타필라에서 한국을 알리기까지의 이야기
2010년 봄, 나는 요르단 남서쪽의 조용한 도시, 타필라에 도착했다.
암만에서 차로 3시간 가까이 떨어진 이곳은, 이슬람 전통이 짙게 배어 있는 지역이자,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도시였다. 나는 그곳의 공과대학에서 토목 분야 실습을 지원하며 KOICA 봉사단원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나는 외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학생들은 나를 볼 때마다 “씨니!(중국인)”를 외치거나, 지나가며 소곤소곤 “니하오”를 던지곤 했다. 어떤 이들은 ‘잭키찬’이라 부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웃어 넘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반복된 호칭이 마음에 작은 금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내 조국은 더 이상 그저 자동차 수출국이 아닌, 다양한 문화를 가진 독립된 나라다. 하지만 타필라의 사람들에게, 한국은 아직 ‘중국의 어디쯤’이었다. 그렇게 오해 속에 나와 내 나라가 묶여 있는 현실은 생각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나를 중국인이라고 부르나요?”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대부분은 한국산 중고차나 TV 브랜드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에게 한국은 지리적 위치도, 역사도, 문화도 그저 ‘모호한 아시아의 한 국가’였다.
이대로 2년을 보내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씨니’로, 혹은 ‘잭키찬’으로 남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 자신을 알리는 것보다 먼저, 한국을 알리자.
한국을 알리면, 결국 나도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어도, 아랍어도 유창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손으로 쓰고, 몸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행정실을 오가며 학교 측에 ‘한국의 날’ 행사를 제안했고, 포스터를 만들고, 사인을 받기 위해 학생처장을 수소문했다. 대학교 복도를 돌며 교수들의 문을 두드렸고, 아랍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내 의도를 전달했다.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작은 용기는 하나씩 문을 열었다.
행사 당일,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암만에서 출발한 발표자들이 버스를 기다리느라 늦은 것이다. 이곳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떠나지 않는다. 자리가 모두 찰 때까지 기다린다. 2시간 반을 버스 안에서 보낸 친구들은 결국 30분 늦게 도착했다. 나는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요르단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인샬라(신의 뜻대로)라며 기다려주었다.
그날의 ‘한국의 날’은 그렇게 늦게 시작되었지만, 어느 행사보다 진심이 담긴 시간이 되었다. 유창한 아랍어로 사회를 본 유학생들, 한국과 이슬람의 공존을 주제로 한 프레젠테이션, 한국관광공사와 문화재단에서 보내온 영상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정서에 닿게 구성되었다.
행사는 약 1시간 반 정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다가 아니었다. 행사를 준비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설명했던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이미 나를, 그리고 한국을 전달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기념사진을 찍고, 한국에 대해 물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씨니”가 아닌, “꾸리(코리아)”로. 물론 여전히 ‘씨니’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하나씩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들 곁에, ‘한국’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새겨지고 있다는 걸. 내가 만든 ‘한국의 날’은 하루뿐이었지만, 그 하루는 나의 2년을 바꿨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 기억 속 ‘한국’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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