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남부의 작은 도시, 타필라. 나는 이곳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한국 사람일 것이다. 크고 작은 골목길, 갓 수확한 과일과 채소를 파는 가게, 사람들의 웃음이 머무는 과자 가게 아저씨, 고기를 주문하면 장난부터 치는 청년이 있는 정육점, 그리고 유일하게 열쇠 복사가 가능한 곳까지 타필라는 내게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하며, 정감 있는 ‘우리 동네’다.
한국 사람으로서 나는 이곳 타필라에 유일하게, 그리고 최초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 작은 도시가 내게 남긴 것들을 생각하면, 가끔은 내가 역사의 작은 일부가 된 것만 같기도 하다. 타필라는 그리 화려한 도시가 아니다. 오래된 도시이지만 특별한 관광 명소나 유명 유적지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나 구약시대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성경 신명기에서는 단 한 번 “도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뿐이다.
수천년의 역사속에 살아남은 왕의 대로가 도시를 관통하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길은 지금도 아스팔트 아래 조용히 숨 쉬고 있다. 타필라는 그런 길 위에 조용히 서 있는 도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명 관광지인 페트라나 아카바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타필라를 스쳐 지나간다. 멈추지 않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다르다. 타필라에는 나만의 유적지, 나만의 추억이 있다. 가끔 지인들이 방문하면, 나는 조심스럽게 타필라 성을 소개한다. 사해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성. 문은 대부분 잠겨 있지만, 동네 아이들이 신기한 외국인을 보고 문지기 아저씨를 불러주는 따뜻한 장면은 이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함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 보면, 기대했던 웅장함 대신 쓰레기와 적막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도 과거의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있다. 성이라기엔 작고 초라하지만, 내겐 소중한 기억이 깃든 장소다.
타필라의 저녁 하늘은 한국의 시골을 떠올리게 한다. 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어둠이 모든 움직임을 잠재운다. 사막을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한 줄기 빛이 전부인 밤, 나는 종종 혼자 길을 걷는다. 그 길 위에서 가끔은 고슴도치와 마주치기도 한다. 요르단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 동물원에서나 보던 동물을 만나는 순간, 묘한 이질감과 따뜻한 재미가 동시에 찾아온다.
차량 경적 소리도 잦아들고, 해가 지면 도시 전체가 빠르게 조용해지는 이곳에서 나는 소소한 행복을 배운다. 이 작은 도시, 타필라에서. 한국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을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귀한 경험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지금, 타필라에서 나는 다시 '처음'이 되었고, '유일함'이 되었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이곳 타필라에 오게 된다면, 단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 도시를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는 것—그 자체가 삶에 한 줄 웃음을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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